뒤늦은 퇴사일기 (하)

2019년에 인스타그램에 작성했던 글입니다.

무서운 그들

이별 사유

퇴사를 하고 나갈 때 회사에 하고 싶던 얘기가 참 많았다.

회사생활 2년만에 내가 왜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는지,

그간 느낀 조직의 불합리와 비효율들을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 떠나버린 마음에 하려던 말은 못하고..

사직서에 ‘진학’, 두 글자만을 퇴사 사유로 남겼다.


퇴근 후 술만 늘어갔다

고인 물

빠른 출근이나 늦은 퇴근보다 힘들었던 것은 정체되는 느낌이었다.

괜찮은 연봉과 남들보다 많은 휴가에 적잖이 만족할 때도 많았지만,

퇴근 후 느닷없이 몰려오는 공허함은 내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한 곳에만 멈춰있기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새로운 여정에서는 좀 더 가치있고, 내게 의미있는 길을 발견하길..


초속 5센티미터


신카이 마코토 <秒速5センチメートル>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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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생활을 하고 있는 것뿐으로 슬픔은 쌓여만 간다.

햇빛에 바랜 시트에도, 세면장의 칫솔에도, 휴대전화의 이력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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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 년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닿지 않는 것에 손을 팔고 싶어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대부분 강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생각이 어디서부터 찾아오는지도 알지 못하고..

나는 단지 일을 계속하여 문득 깨닫고 보니,

날마다 탄력을 잃어가고 있는 마음이 오로지 괴로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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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아침..

이전에 그렇게까지나 진지하고 올곧았던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을 나는 깨닫고

이제 한계라는 것을 알게 된 때,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에서 남미 지도 출력

막연한 계획

마지막 출근일이 결정된 후, 많이들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왔다.

남미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 유학 준비를 할 것이라 대답했다.

사실, 여행도 유학도 막막한지라 덧붙일 말이 딱히 없었다.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지는 않았다.

앞날에 대한 걱정보단 당장 여행의 설렘에 집중하고 싶었다.


야근 또 야근

말말말

퇴사 얘기가 팀장님 윗선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평소에 얘기 나눌 일 없는 분들과 대화를 하게 됐다. 꼭 퇴사를 해야하는 타당한 이유를 들어 본인을 납득시켜보라는 논술형 인간이 있었고, 커피 한 잔 사주면서 우리 부서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는 설득형 인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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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고쳐먹을 며칠의 말미를 두 번이나 하사받았다. 그 이후로 윗분들은 설득이 효과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전과는 다른 말들을 했다. 우리만큼 근속 연수 높은 회사가 없다, 바깥의 취업시장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고 있느냐 등등.. 부모님께 퇴사 허락을 받았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하루 빨리 회사를 벗어나고 싶었다.


고등학생이 읽긴 좀 어려웠다

희망보고서

컴퓨터공학도로서의 대학 생활을 한 달여 앞둔 나의 생일 날, 아빠는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하셨다. 사실 별로 재미있는 책은 아니었고 내용도 와닿지 않아서 책장에 넣어놨었다. 퇴사를 고민하던 어느 날, 책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읽어봤다. '희망보고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은 IT 개발자의 암울하고 퍽퍽한 현실을 다룬다. 내가 개발자로 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업무 상 그들과 일할 기회가 많았던지라 내용이 많이 공감됐다. 책에서 나오는 IT 개발의 폐단은 이 것을 읽을 당시인 2016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 싶다. 어언 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한 그 모습 그대로.


노조아저씨들 쳐들어오던 날

바른 생활

어릴 적부터 남들이 시키는대로 내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았다.

학교와 학원다니고, 재수하고 대학가고, 군대에 취직에..

보편적인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적 없이 무난히 살아왔다.

사직원 결재 문서에 전무님 사인이 그려지던 날,

앞으로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달라질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퇴근길에 올려다 본 높은 회사 건물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진정한 여행

후회

퇴사 후 여행을 다녀온 뒤 주변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

“정말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

난 사실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몰래 정신 승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나는 그 때에도 똑같은 선택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꽃들에게 희망을' 중에서

꽃들에게 희망을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새로운 것을 손에 얻기 위해서는

이미 쥐고 있는 것들을 놓아야 한다.

나는 언젠가 내가 그리던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언제쯤 이 방황이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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